이데아론에 대해

코리아앱
2022.02.14 17:12 7,43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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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앱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서들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자주 나온다. 그 취지는 간단히 말해서 이데아론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과연 어떻게 그것이 우리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데아론은 이분법이라는 철학 개념이며, 이는 결코 우리 프로젝트의 기반이 아니다. 우리의 프로젝트가 극복하고자 하는 대상일 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세상은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되어 있다. 하나는 이데아, 즉 완벽하고 영원불변한 진리의 세계로서,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세계. 다른 하나는, 현실 세계, 즉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세계로서 인간의 오감(시각, 후각, 미각, 청각, 촉각)에 의해서 경험되는 허상의 세계.

따라서, 이데아론은 세계를 이렇게 둘로 쪼개 버린다는 의미에서 이분법적 또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라고도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플라톤의 이분법(이원론)3가지 차원에서 모습을 나타낸다. 첫째,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세계와 세계의 분리 (완벽한 이데아 대 불완전한 현실세계). 둘째, 앞의 세계를 각각 알게 해주는 인간 능력의 파트 분리. , 이데아를 알게 해주는 것인 영원 불멸의 인간 정신(이성) 대 현실 세계를 다만 경험으로 알게 해주는 나약한 육체. 셋째, 현실 세계 내에서,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고귀한 이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 대 이러한 고귀한 인간의 단지 분석/활용 대상으로서의 자연. 종합하면, “이데아 : 현실”, “이성 : 육체”, “인간 : 자연”.  

그러나 이러한 무모하리만치의 단순한 분리는 오늘날에 와서는 무지의 표현이자, 무식한 자의 용기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이데아론의 문제점은, 이렇게 단순히 두개의 세계로 나눈 것에 그치지 않는다.

먼저, 그 두 세계 이외의 다른 세계(3세계)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중에 헤겔과 그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이분법을 주장하면서도 이 갈등, 투쟁한 결과 이라는 제3의 가능성이 현실화된다고 이론 수정을 하기도 하였다)

둘째, 분리된 두 세계 마저도 서로 절대로 융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더욱 큰 문제점은, 그냥 분리한 것에 그치지 않고, 각각에 대해 가치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다. , 한쪽의 세계는 선한/좋은(good) 것이고 다른 쪽 세계는 악한/나쁜(bad)것이라고 낙인을 찍어 버린다. 이렇게 절대 융합할 수 없는 두 세계로 분리를 하고, 한쪽을 선한/좋은 세계로, 그리고 다른 쪽을 악한/나쁜 세계로 규종을 해버리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선한 세계가 악한 세계를 교정하고 바꿔주어야 하며, 이것이 선한 세계의 도덕적 책무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악한 세계의 도덕적 의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바뀌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실로 억울한 일이다.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여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고 행위를 한 결과, 즉 산업화를 통해 자연은 파괴되었다.

문명의 상징이자 플라톤의 후예, 계몽의 주체인 서양이 야만의 상징이자 계몽의 대상인 동양을 식민지화하여 필요하면 억압과 폭력 수단을 써서라도 고쳐줘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이는 어쩌면 플라톤 자신이 찬양했던 국가론인 철인정치론(철학자가 국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론)”의 국제판 버전이기도 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를 알고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계층은 철학자 밖에 없으며, 따라서 철학자가 최고 지도자가 되어서 불완전한 현실 세계의 민주제를 끝장내고 우매한 민중을 몽둥이질 해서라도 고쳐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에 대비되는 감정과 욕망과 몸뚱어리는 불결한 것으로 낙인 찍혀서 교화와 교정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이러한 플라톤의 이분법과 선악 개념에 기반하여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세계절반의 고통에 무관심했다. 이데아론과 이분법론이 분절된 절반 세계의 가치만을 인정하고 나머지 절반의 세계에 폭력을 가하게 된다는 비극은 근/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서구사회가 깨달은 불편한 실상이었다.

이것을 용기 있게 똑바로 지적한 이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유럽이 병들고 미쳤다고 진단하면서, 그 원인이 플라톤주의, 즉 이원론과 주체중심주의였음을 날카롭게 밝혀냈다. 니체 이후의 서양 철학은 플라톤 주의를 혐오하고, 거부한다. 또한 플라톤이 가치 절하했던,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하고 불완전한 것들의 세계를 복권해내는데 집중한다. 이러한 노력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하는데, 20세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문, 예술 등 전분야에 걸쳐 일어난 반 플라톤주의 사상적 흐름이다.  

물론 플라톤의 입장을 이해할 수는 있다.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스승 소크라테스, 그의 눈에 가장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자였던 스승이, 어리석고 변덕스런 현실의 민중에 의해 민주주의하의 인민재판으로 죽음에 이른 상황에서 그의 이데아론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마음에는 슬픔과 분노가 차올랐을 것이 당연하다. 이제 영원불변하고 완벽한 이데아 (소크라테스와 그의 이성적 진리를 말함)와 그의 진리(즉 이데아 세계의 말씀)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파멸시킨, 이성적 판단은 할 수 조차도 없고 단지 집단심리와 감정에 휘둘리는 민중과 민주제(현실 세계)는 엄격히 분리되어야 했고, 전자가 후자를 철인정치를 통해 끝장내고 변혁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플라톤 본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으나, 결국 그의 이데아론도 바로 민주제가 저지른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법 살인이라는 현실적 배경에서 튀어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적 배경에서 그의 이데아론이 나왔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현실과 이데아가 플라톤의 이분법 주장과 달리 그렇게 철저히 분리되어 따로 돌아가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 때때로 이데아도 현실의 산물인 것이다. 나의 논점은, 플라톤의 이데아론 역시 현실과 분리되어 초연하게 플라톤의 순수 이성 능력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프로젝트는 무엇이겠는가?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문제점을 극복하여, 현실과 이데아가 서로 대화하고 융합하고 상생하도록 해주려는 시도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는 플라톤 철학을 받아들이거나 그의 철학을 출발점으로 삼는 한 절대 불가능한 과제이다. 그의 철학과 세계관을 확 지워버려야 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니체 철학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이분법의 문제점을 지적한 용기 있는 천재였으나,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고,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 세계의 가치를 복원하였으나, 이데아 세계를 부정하는 대가를 치렀다. , 이 역시 반쪽의 세계의 가치만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넘어서, 양 세계를 존중하고 상호 연결성을 도모하는 프로젝트이다. 어찌보면 동양의 위대한 스승들이 전개했던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도가, 불교, 베다의 사상은 세계와 자아의 통합”, 즉 세계와 자아, 현실과 이상향이 그 근원에서 분리되지 않았음을 이미 수 천년 전에 이해하고 있었다. (반면에 플라톤으로 시작해서 니체에 와서 부정되는 그 사이 기간 동안 서양철학은 이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었다.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4세기에 플라톤 철학을 기반으로 원시 기독교를 체계화했고, 이후 기독교도 이원론적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다.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정도가 예외였으나 이단으로 몰려 사망했다.)    

도가 사상의 핵심을 드러내 주는 일화인 호접몽(나비의 꿈)”을 보자.

어느 날 장자 라는 사람이 깜빡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자신이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 다녔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보니 자신은 장자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각한다.  나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나비가 그의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꿈과 현실, 장자와 나비를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장자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자라는 경지, 즉 주체와 객체, 나와 세상이 하나라는 만물일체의 절대경지에서 보면 장자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없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나비)의 꿈 속일지도 모른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이러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유명했던 영화 매트릭스또한 호접몽의 사이버 버전이 아니겠는가?    

현실의 세계와 꿈이라는 가상 공간이 이렇게 심오하고 멋들어진 표현으로 공존하고 있지 아니한가? 아마도 오늘날의 메타버스나 ARVR의 원류는 이 정신이 아닐까?  

새로운 디지털 세상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과 철학의 변화를 요구한다. 플라톤의 굴레로부터의 과감한 탈출을 요청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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